[FlyingFile] 케이블 없이 스마트폰 ↔ PC 파일 전송하기..!!

잡동사니/Utill. 2017. 10. 25. 19:37

  얼마 전, 스마트폰 내부에 있는 파일을 PC로 옮길 일이 있었더랬다.

용량이 얼마되지 않는다면 메일로 전송하면 되겠지만..약간은 대용량인지라..


처음엔 Dropbox를 이용해서 올리고 받고 했는데..

파일 수가 많으니까 일일이 찾아서 올리고 받고 하는게 귀찮더라..;;

그래서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건데..


이게 좀 신박하다..ㅋ


PC에 유틸을 설치하고, 스마트폰에 어플을 설치하여 동일한 아이디로 로그인을 하면 상호연결이 되어..

다이렉트로 파일 전송이 가능하더라..


스마트폰과 테블릿 기기 역시 어플설치가 되어있다면 파일전송이 가능하고..

기존의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파일을 전송하는 것보다 전송시간도 빠르다..!!


일일이 캡쳐해서 설명글 적어 올릴까 했는데..


공식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어 그것으로 대체한다.




<출처 - 개발사 공식홈페이지>



FlyingFile_Setup.exe

FlyingFile-2.0 사용자 매뉴얼_Rev3(05.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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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근대 역사관,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에 다녀오다..- ③

 

  이번 마실의 메인이자 마지막 목적지인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부산 지하철 2호선 못골역 1번 출구에서 '남구 9'마을버스를 타면 역사관 바로 앞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유엔 평화 기념관·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는데..

'유엔 평화 공원' 정류장과 헷갈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ㅋ;;

(우리는 정류장을 헷갈려서 아래에서 부터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가야 했다는...ㅋㅋㅋ;;;)



  입구에 가득 쌓여있는 '국민노무수첩'..

처음엔 정확히 뭔지 몰랐는데, 역사관 자료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 개는 되겠던데..

강제로 징용당한 분들의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


 물자 공출

 

  일제는 1910년부터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수많은 농민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다. 1920년부터는 산미증식계획을 강행하여 생산 능력을 넘어서는 양의 미곡을 일본으로 송출하였다. 그 결과, 많은 농민이 미곡수탈뿐만 아니라 늘어난 각종 비용 부담으로 말미암아 농토를 잃고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터전을 떠나야만 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전후로는 물자 공출 제도를 정비하고 금융통제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3차에 걸친 생산력확층계획을 통해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산림 등을 통제하였다. 군인과 군마의 식량은 물론, 각종 군수물자를 샅샅이 훑어갔고 물자통제와 생필품 배급제를 시행하였다.

  1944년 패전이 임박하면서 물자난이 극심해지자 전시농업요원제도나 농업생산책임제를 시행하여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식량 생산 책임 수량을 달성하도록 강요하였다.


 

'공출'되는 사람

 

  일제는 물자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공출'이라는 용어를 조선 민중에게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식량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공출'의 우선 대상이 되었다. 인력동원은 크게 군인[특별지원병, 징병], 노무자,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로 나눌 수 있다. 인력 '공출'에는 남녀노소 모두 해당하였으며, 노무자로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 노무자는 국민징용령이나 노무조정령 등 일제의 국가 법령에 따라 정책적 · 계획적 · 조직적 · 집단적 · 폭력적으로 각종 산업 현장에 동원되었다. 동원 경로에 따라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官)알선 등으로 세분한다.


 

 

 

  강제동원 주체인 일본이 작성한 통계를 분석했을 때, 강제동원 피해 규모는 최소 7,827,355명 (중복 동원 포함)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인구를 가늠해봤을 때, 가히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4층 전시관 중앙 홀..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모습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람객들이 거의 없고, 조용했는데..

집중해서 전시관을 둘러 보기엔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억해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노동력 강제동원, 여자근로정신대

 

  일제는 이미 시행중인 여성노무동원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동원연령을 확대하여 강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였다. 이 규정에 의한 조선총독부의 '알선지도'에 따라 10대 초·중반의 여학생이 교장 및 담임교사의 지원종용과 감언이설에 속아 강제동원 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4월 경부터 조선이나 일본, 만주 등의 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지슴까지 밝혀진 동원지로 후지코시강재공업(주) 도야마공장,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도쿄아사이토방적(주) 누마즈공장, 인청조병창 등이 있다.

  12~16세의 나이 어린 소녀를 동원하여 군대식 노동규율과 장시간 노동에 내몰았다. 그 결과 소녀들은 크고 작은 노동재해는 물론 지진, 공습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감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귀환 이후에도 다양한 후유증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 당국과 기업은 소녀들에게 약속했던 상급학교 진학을 방기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임금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 '정신대', 오해와 진실

   정신대는 "국가['천황']를 위해 솔선하여 몸 바쳐 일하는 부대" 라는 뜻으로, 일제가 노동력 동원을 확대하기위해 사용한 상징적 용어이다. 남녀노소는 물론, 노무자·군인·군무원 모두가 포함된 용어였으나 일반적으로 일본군 '위안부'[각주:1] 로 알려졌다. 일본 당국이 '위안부' 동원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당시 조선사회에서도 정신대를 '위안부' 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와 동일한 의미로 수용 · 확산되면서 일본에 동원되었던 여성노무동원 피해자 전체가 끊임없이 가부장적인 시선과 부딪치는 이중적인 피해를 낳았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전시동원경험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면이다.

 


 

  입구에서 봤었던 '국민노무수첩'...

 

 

  강제동원을 해갔으면 최소한 그에 응당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게 옳지만..

그럴거였으면 강제동원을 하지도 않았겠지...

  

  * 노동조건

  조선인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노동계약은 체결될 수 없었다. 동원하는 자와 동원당하는 자의 관계일 뿐이었다. 조선인을 노동조건이나 근무환경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동원되었다.

  일본 당국과 기업은 형식적으로 만든 계약서마저 임의로 변경하여 강제동원 기간을 연장해버렸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작업장은 물론 숙소에서도 통제되었고, 숙소나 침구조차 없이 가마니 속에서 잠을 청한 사례도 있었다. 기본적인 작업교육도 시행하지 않아 노동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사고로 사망한 노무자에 대한 부조나 유해봉환이 규정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국제법 규정을 위반하면서 소년·소녀의 노동력까지 착취하였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노동의 가혹함은 물론 굶주림과 모멸감으로 더욱 고통받았다.

 


 조선농업보국청년대

  

  1940년경부터 1944년까지 매년 2회씩 농번기에 시행되었으며 15회에 걸쳐 총 3,000명의 조선농촌 청년을 일본에 파견한 제도였다. 일제는 조선 농업보국청년대 파견의 명분으로 선진 영농법 습득 등을 내세웠지만 그 실체는 일본농가에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 전후 연합군은 도쿄와 일본군 점령 지역 등에 설치된 국제전범대판을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단죄하였다. 이 국제전범재판에서는 조선인 148명도 실형에 처해졌다. 조선인 전범 중 129명은 군무원 신분의 포로

감시원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명령을 받아 연합군 포로를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직접 포로를 상대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전후 연합군의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은 가혹행위의 책임을 포로감시원에 전가하였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지 못한 연합군 포로는 조선인을 전쟁범죄자로 지목하였다. 전범으로 처벌된 조선인 중 사형을 당한 조선인은 모두 23명이었으며 그 중, 포로감시원은 14명이었다.

 

 B · C급 전범으로 수감된 피해자 [포로 감시원]

 

  동남아시아 지역 포로수용소에 강제동원된 군무원 중 많은 피해자가 일제 패망 후 B · C급 전범으로 현지에서 수감되었다. 사형을 면한 수형자들은 1950년대 초반 스가모 형무소[각주:2]로 이감되었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인 전점이 석방되는 와중에도 조선인은 상당수 제외되었고, 소송까지 진행되었으나 조선인의 석방 청구는 기각되었다.

 

 

특별지원병

 

  특별지원병은 1938년 일본 육군의 특별지원병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특별지원병은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일제가 조선인을 군인으로 지원하도록 한 것은 침략전쟁에서 필요한 병력 자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지원은 형식에 불과하였고 실제로는 지역별 할당과 유력자의 선동과 회유, 관공서와 경찰의 협박이 뒤따랐다.

  특히, 당국에서 적격자 전원의 입영을 목표로 했던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는 전문학교 재학 이상 대상자 중 96%가 지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강요와 협박이 자행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나마 지원을 거부한 사람은 강제로 수용되어 군사훈련과 사상교육을 받았고, 이후 응징학도 · 학도응징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내 여러 작업장에서 노역을 강요당하였다. 특별지원병제도에 의한 동원은 육군 2만 천여명 (학도지원병 포함), 해군 3천 명에 이른다.

 

 

  여러 분야로 강제동원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카미카재에도 동원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미카재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여기에도 우리들의 선조가 투입되었을 줄이야..

스스로 무지했다는 사실이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러웠다.

 

▶ 자살특공대로 강제동원된 인재웅의 사진이다. 제 4항공군사령부 소속 군인으로 강제동원되어 1944. 11. 29.

필리핀 레이테 만에서 사망하였다.

 

▶ 제 13기 동경육군항공학교 소년비행단 동기생들이 인재웅 사망 이후 만든 비망록..

 

  일본군이 주둔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위안소가 운영되었다고 하니..

위의 사진자료만 보아도 그 수가 어마무시하다..

 

▶ 강제동원된 학도지원병 중 중국 전선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실패하면 투옥이나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생명을 담보로 한 이들의 탈출은 일제에 대한 항거를 넘어 항일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였다.

 


 일본으로부터의 귀환...

 

  패망한 일본 정보는 조선인의 귀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구로 밀려 들었다. 그러나 항구에는 배가 거의 없어서 조선인은 노숙하면서 몇 달씩 항구에서 기다려야 하였다. 급한 마음에 무허가 선박이나 소형 어선 등을 타고 귀환하기도 하였지만, 태풍을 만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에서야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조선인 송환에 대한 지령을 내려 집단송환이 이루어졌지만, 들고 갈 수 있는 화물의 무게와 돈을 1인당 250파운드 (113.4㎏), 1,000엔 이하로 제한하였다. 당시 1,000엔은 한국에서 겨우 쌀 두 말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때문에 귀환을 미루거나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강제로 끌려가 중노동에 시달린 조선인은 착취당한 임금과 강제로 예탁한 저금 등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채 목숨만 부지해 돌아와야 하였고, 일부는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는지만 강제동원 역사관에서 사진과 영상자료를 보고나서는 느낀 점은..아휴..;;

 

  일제치하에서의 고통을 뒤로한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을 말 그대로 수장시키다니..

마지막까지 진실을 감추려 만행을 저지른 일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일제치하에서 강제동원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 기업들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업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일일이 체크해보고 싶었지만, 관람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고 뒤로하였다.

 

  4층 전시관의 마지막이었다.

사실 전시관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일제의 악행을 생각해보자면 분노가 차오르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강제동원 역사관은 각종 자료들을 근거로한 사실을 보여주되 현재가 아닌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있는 듯 했다. 맹목적으로 일본을 욕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힌 일본이었지만 현재의 일본내에서도 양심을 통해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알리려 노력하는 사람들일 있음이 불행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4층 중앙홀에서 "4번의 전쟁, 아물지 않은 상흔"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1904년 러일전쟁..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4번의 전쟁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과 그에따라 우리에게 남긴 상처와 흔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요로코롬 시기별로 구역을 나누어서 전시가 되어있고..

전쟁의 원인과 배경 등의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쉬워서 좋았던 것 같다.

 

▶ 담배카드 - 독일 리비히 시에서 발행한 홍보용 카드로 조선군인, 궁궐, 서울 시가지 등 서양인들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 세계대전기념대지도 - 일제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주요인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 청일전쟁 판화


▶ 태평양전쟁 엽서

 

▶ 태평양전쟁 일본군 엽서

 

 

  다음 전시관은 다음 층인 5층에있서 5층으로 고고~~!!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 전체에 강제동원 피해자와 기증자들의 사진액자가 가득 걸려있었다.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시관 시작과 함께 볼 수 있던 벽면의 문구..

 

▶ 일본 홋카이도개척지기념관(北海道開拓記念館) 다코베야(タコ部屋) 모형을 바탕으로 제작

 

 

 

  짧은 에피소드를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다코베야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탄광입구..

 

▶ 사갱(斜坑)에서 누운 채로 채탄 작업 중인 조선인 노무자

 

▶ 탄광 사고현장

 

▶ 탄차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조선인 노무자

 

▶ 중 · 서부 태평양의 방공호는 항공기의 공습을 피하고, 적의 함포 사격이나 지상군의 포격을 피하고자 땅속에 굴을 파거나 지상에 엄폐물을 구축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공습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조선인들은 방공호에 못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방공호 앞 쪽 표지판을 보기에 "朝鮮人~防空壕~ない" 정도만 보여서 부정적인 뜻이란 것만 파악하고..

  후에 번역기를 돌려봤더니..

"조선인은 방공호에 들어갈 수 없다" 는 경고문이더라..ㅂㄷㅂㄷ

 

 

  위안소 내부의 모습으로 규칙을 정리한 판과 사람이름으로 보이는 명패가 걸려 있었다.

 

 

'위안소 규정'..

 

  위안소 방 내부..

 

 

  

 

  6층에서 바라본 중앙 홀 모습..

 

 

  6층에서는 이재갑 사진작가의 작품이 기획전시 되고 있었는데..

최근, 군함도를 통해 많이 알려진 '하시마 섬' 에서 촬영된 작품들이었다.

 

 

  작년에 다큐멘터리를 봤을 떄, 현재의 관광코스에는 미공개 구역이 많다고 들었는데..

작가님이 사진을 찍을 때는 제한구역이 없었는지 구석구석 촬영된 사진이 많았다.

11월 말까지 전시회가 개최되니 기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다큐멘터리에서 일본이 '하시마 섬'을 유네스코 산업유산으로 등재하고 관광상품화하여 많은 기념품들을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실물을 여기서 볼 수 있었다.

 

  올 12월 까지 '군함도에 한국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일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것' 이라는..

유네스코 권고사항을 좀 더 지켜봐야 확실해 지겠지만..제대로 이행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

현재의 일본의 행동을 본다면..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 같고..

이에따라 과연 유네스코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관심있게 봐야할 것 같다.

 

 

  전시관을 나오면서 '추모의 계단'에서 찍은...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을 보고난 후, 전체적인 느낌은..

4층에서는 사진과 영상, 글..그리고 유물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고..

5층에서는 그 내용들을 토대도 좀 더 공감할 수 있도록 간접적인 체험과 같이 만들어 놓은 듯 하였다.

내용 자체도 어렵지 않고, 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느꼈다.

  1.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 이후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시작된 '위안소'는 중·일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났으며 정령지 확대에 따라 거의 모든 일본군 주둔지로 확대되었다. 피해자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문제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지 않으나, 당시 일제가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영어로는 본질적인 의미를 반영하여 '일본군 성노예(Sex Slaves)'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2. 도쿄 스가모 형무소(巣鴨刑務所) : 일제 패망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접수하여 전범을 수용하였고, 도조 히데키 등 전범 7명을 사형시켰다. 사형을 면한 전범과 해외에서 이감된 전범이 계속 수감되었는데 그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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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근대 역사관,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에 다녀오다..- ②

  근대 역사관을 나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위해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점심식사를 할 곳으로 몇 군데 생각해두었었는데 그 중에서 '동명 칼국수' 로 결정!!



 

  국제시장 내에 위치한 동명 칼국수..

지도보면서 찾아가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맛집으로 검색해서 찾아간거였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전에 왔었던 곳이더라..ㅋㅋㅋ;;;


 

   역시, 왔었던 곳이 맞았어..!!ㅋㅋ

올라가는 계단이며, 식당 내부의 구조며..ㅋ

 


  날이 더우면 무조건 냉 칼국수 먹어야지 결정하고 왔기때문에..

고민없이 냉 칼국수 주문..!!ㅋ



  짜잔~!!얼음이 띄워진 냉 칼국수..

시원하게 한 뚝배기(?) 완칼!!ㅋ


사실 나오면서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한 칼국수를 보고 한 그릇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한건 안 비밀..ㅋㅋ


  점심을 먹고 나온 시간이 예상보다 일찍이어서..

빼려고 마음먹었던 '부산 전차'를 본래 계획대로 가기로 결정!!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후문쪽에 위치한 '부산 전차'는..

1952년부터 1968년까지 부산 시내에서 운행하던 전차로 미국 애틀란타 시내에서 20년 이상 운행되다가..

한국전쟁 이후, 무상원조 형식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내에 남아있는 전차 3대 중 한대로..

서울에 위치한 2대[각주:1]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인 반면에 부산 전차는 유일하게 미국에서 제작한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15분 가량 걸어서 도착한 '부산 전차'..

 

 

  부산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후문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후문으로 들어가면 요로코롬 가까이서 볼 수도 있음..ㅋ

 

 

  '부산 전차'를 운행하던 시기의 사진자료..

 

 

  당시의 전차 승차권..

 

 

  온천장에서부터 운동장 전차종점까지의 노선..

동래, 서면, 부산역, 시청 등 주요 지점이 표기되어 있었다.

 

 

  '부산 전차'는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후문쪽에 위치한 임시수도기념거리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재하고 있는 곳이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이기 때문에 캠퍼스 내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오후 1시~2시 사이에만 내부를 개방한다고 한다. 외부를 보는 것은 시간제한은 없는 것 같다.

 

 

  조향이야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갈거니까 굳이 필요가 없었을 듯 싶고..

전, 후진 기어와 속도, 브레이크 정도의 기능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양쪽으로 좌석이 나뉘어진 모습이다.

순방향, 역방향 공평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ㅋ

서울 역사 박물관 앞에 위치한 전차를 봤었는데..

거긴 내부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히 사진 찾아보면 있을텐데..ㅋ

 

 

 

 

 


  '부산 전차'를 보고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으로 향했다.

 







  1.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한 대를 봤었는데, 나머지 한 대는 서울 창경궁 근처에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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